철강벨트 지역민 10명 중 7명 ‘철강산업 위기’...포항에선 8명이 이미 ‘체감’
중국, 그린수소 프로젝트 및 재생에너지 기반 제철 인프라 확대해 저탄소 고급강 시장 선두
수소환원제철 설비 전환 시 일자리 창출, 온실가스 감축, 수출 경쟁력 강화 기대
정부가 최근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을 내놓으며 수소환원제철 실증사업과 철스크랩 재활용 확대 등 탈탄소 전환 계획을 제시했지만, 여전히 선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반면 지역 산업 현장에서는 ‘당장 철강의 탈탄소를 시작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렵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리서치가 기후솔루션 의뢰로 포항, 광양, 당진, 순천 등 철강벨트 지역 주민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 철강 산업 탈탄소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의 65.3%가 “철강산업이 현재 위기 상황”이라고 답했다. 특히 포항 지역은 75%가 철강산업의 위기를 체감했고, ‘심각한 위기’로 느끼는 비율은 27.1%로 타 지역의 두 배 수준이었다.
응답자 10명 중 8명은 “국제적 탈탄소 요구가 강화되고 있다”고 답했으며, “기후 대응이 늦어질 경우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응답자도 10명 중 7명에 달했다. 응답자 대부분(79%)은 “국제 경쟁력이 약화되면 지역경제가 붕괴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국내 철강산업은 해외 생산거점 확대와 투자 분산 등으로 지역 산업의 활력이 약화하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주요 기업들이 미국 등지로 투자를 확대하면서, 국내에선 신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정체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지역 경제 전반의 공동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역민들은 이미 철강산업 위기로 인한 지역경제 침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제철소 지역 주민의 64.9%는 ‘철강산업 위기로 지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겪었다’고 답했고, 포항에선 같은 응답 비율이 80%에 달했다. 특히 ‘지역 내 일자리 축소 및 신규 고용 감소’(77.3%)였고, ‘지역 소상공인 매출 감소 및 폐업 증가‘(66.5%)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조사에서 제철소 지역민들은 철강산업이 앞으로 지역경제에 미칠 긍정적 영향이 68.4%로, 과거 영향력(79.4%)보다 11%p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철강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해당 산업이 위축될 때 지역경제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포항에서는 “경기 침체·수요 감소로 지역경제가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응답이 65.1%, “이미 경제 위축을 체감하고 있다”는 응답이 64.3%에 달했다.
광양과 순천 지역에서는 경제적 불안뿐 아니라 환경·건강 문제에 대한 우려도 컸다. 광양 주민의 61%, 순천 주민의 57%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크다”고 답했다. 이는 철강벨트 전반이 경기 침체와 환경오염이라는 이중의 위기를 동시에 체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민 78% “정부 예산 확대해야”
철강벨트 지역 주민들은 철강 산업의 탈탄소 전환이 산업 경쟁력뿐 아니라 지역경제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인식을 이미 공유하고 있었다. 응답자의 71.2%는 “탈탄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수출에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답했고, 78.8%는 “수출이 흔들릴 경우 지역경제도 직접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함께 71.3%는 “탈탄소 전환이 지역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70.5%는 “탈탄소는 지역경제의 핵심 과제”라고 평가했다. 이는 CBAM 등 국제 탄소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기후 대응이 산업 경쟁력은 물론 지역경제의 생존과도 직결된다는 인식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의 요구와 달리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4일 발표한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에는 수소환원제철 실증과 청정수소 확보 등이 포함됐지만, 구체적인 이행 전략과 실행 로드맵은 부재하다는 평가다. 산업 정책과 탄소중립 전략이 별도로 설계돼, ‘탄소중립이 곧 산업 경쟁력’이라는 관점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중국이 대규모 그린수소 프로젝트와 재생에너지 기반 제철 인프라를 빠르게 확대하며 저탄소 고급강 시장을 선점하는 동안, 한국은 정책 불확실성과 실행 지연으로 대응이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주민들은 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한 해법으로 △수출 경쟁력 회복(44.5%) △고급 철강 제품 생산(40.1%) △친환경 기술 투자(39.3%)를 꼽았다. 특히 응답자의 65.3%는 수소환원제철 설비 전환에 찬성했으며, 33.7%는 “가능한 한 빠르게 추진해야 한다”고 답했다. 찬성 이유로는 일자리 창출, 온실가스 감축, 수출 경쟁력 강화가 꼽혔다.


반면, 수소환원제철 설비 전환에 대한 반대 이유로는 ‘기술 한계’가 아니라 개발·설비 비용 부담(50.5%)이 가장 크게 나타났다. 주민들이 정부에 요구한 과제 역시 수소 공급망·전력망 등 지역 기반 인프라 구축 지원(62.3%)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기대하는 응답도 많았다. 응답자의 77%는 ‘정부가 탈탄소 전환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61.9%는 ‘철강 산업의 중요성에 비해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AI·반도체 등 신산업과 기존 산업 간 지원 균형이 적절하다고 평가한 비율은 31.9%에 불과했다. 또한 62%는 철강 탈탄소 의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정치인을 지지하겠다고 응답해, 산업 전환과 기후 대응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지역 유권자의 주요 판단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기후솔루션 철강팀 강혜빈 연구원은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것처럼, 철강벨트 지역은 이미 ‘산업 전환이 곧 지역경제의 생존’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며 “그러나 정부와 기업의 전환 준비 속도는 여전히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소환원제철, 그린수소, 재생에너지 등 핵심 인프라는 1~2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며, 현재 제시된 전환 로드맵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도 보다 빠른 준비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세계 시장이 이미 저탄소 고급강 경쟁에서 앞서가고 있는 만큼, 정부와 기업은 석탄 기반 고로 폐쇄와 저탄소 공정 전환의 속도를 높여 지역의 절박한 우려에 실질적으로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 8월27일부터 12일간 전남 광양, 충남 당진, 전남 순천, 경북 포항 등 제철소 소재 지역 혹은 인근 지역에 거주 중인 성인 2574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로 진행됐다. 표본은 지역, 성, 연령별 비례할당 추출 방식으로 구성했으며, 충남 당진과 전남 광양은 임의 할당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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