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중점관리사안’에 기후변화 추가했으나…중점관리·대화 기업 선정 전무
기후 관련 비공개 대화 기업 ‘3곳 제한’, 정보 공개 부족도 문제로 지적돼
해외 연기금은 매년 수백 개 기업과 협의…과정 및 성과 외부 공개도
“적극적인 기후 리스크 관리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도모해야”
국민연금이 기후변화를 ‘중점관리사안’으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조차 선정하지 않는 등 기후 리스크 관리를 위한 실질적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후솔루션은 12일 ‘기업을 움직이는 국민연금: 기후 리스크 관리의 한계와 개선 방향’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국민연금의 기후 리스크 관리 활동을 점검하고, 해외 주요 연기금과의 비교를 통해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들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개선 방향을 제안하는 내용이 담겼다.
앞서 2023년 3월 국민연금은 ‘국민연금기금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을 개정하여, 중점관리사안에 ‘기후변화 관련 위험 관리가 필요한 사안’을 추가한 바 있다. 투자 대상 기업 중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하면서도 감축 계획 및 조처가 미흡하거나 이로 인해 기업가치 하락 위험이 있는 곳을 대상으로, 전략 개선을 요구하거나 주주제안을 진행하는 등 적극적 개입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국민연금이 운용자산 1200조 원에 달하는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만큼, 국민연금의 투자 활동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은 국가 전반의 기후위기 대응과 깊이 연결돼 있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과 후즈굿의 공동 분석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 중 온실가스를 배출량을 공시한 312곳의 금융배출량은 우리나라 전체 배출량의 약 4%에 해당할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한국전력공사, 포스코홀딩스, 현대제철 등은 국민연금이 최대주주 혹은 주요주주로서 영향력이 크고, 국민연금 포트폴리오 내에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은 기업들로 꼽힌다. 이들 기업의 막대한 온실가스 배출은 기후위기를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국민연금의 수익성에도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기후 리스크를 이유로 글로벌 금융기관들로부터 투자가 배제되거나 막대한 관세를 부담해야 할 경우, 주가 및 기업가치가 하락하면서 결국 국민연금의 수익률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2023년 영국 최대 자산운용사 리걸앤드제너럴투자운용(LGIM)은 ‘석탄사업 운영 계획이 2050 넷제로 목표와 맞지 않는다’며 5년 연속 한전에 대한 투자를 배제했으며, 포스코홀딩스 역시 2024년 금융배제추적기(Financial Exclusion Tracker) 데이터 기준, 기후 및 환경 문제 등을 이유로 유럽 30개 투자기관으로부터 투자 대상에서 배제됐다. 현대제철의 경우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국제적인 탄소 규제가 강화되면서 수출 경쟁력 저하가 우려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기후변화를 중점관리사안으로 지정한 이후에도, 기후 리스크 관리를 위한 주주 활동을 사실상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국민연금기금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은 국민연금이 중점관리사안과 관련해 먼저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을 선정한 뒤, 이후에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을 시 ‘비공개 중점관리 기업 지정’, ‘공개 중점관리 기업 전환’, ‘주주제안 등 적극적 주주활동’의 순서대로 조처의 강도를 높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기준 국민연금이 기후변화 사안과 관련해 비공개 및 공개 중점관리 기업으로 지정한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으며, 가장 낮은 단계인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 선정’조차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중점관리사안 중 배당정책·임원 보수 등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된 항목은 물론, 기후변화와 같은 시기에 도입된 산업안전 항목에서는 4곳의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이 선정된 것을 감안하면 현저히 저조한 실적이다. 기후변화 사안으로는 사전절차 격인 비공개 면담을 13곳의 기업과 진행한 내역만 확인됐다.
그림 1. 기후변화 사안에 대한 국민연금 주주활동 절차
표 1. 중점관리사안별 국민연금 주주 활동 현황 비교
기후변화 사안과 관련해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을 ‘3곳 내외’로 선정하도록 한 규정 자체도 한계로 지적됐다. 해외 주요 연기금이 기후 리스크 개선을 위해 매년 수십 수백 개의 기업과 대화를 진행하는 데 반해, 국민연금의 활동 범위는 소수 기업들에 국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포트폴리오 내 다수의 기업들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형식적인 대응만 하더라도 관리 대상에서 제외될 여지가 커지는 셈이다.
더불어 보고서는 제도의 투명성 문제도 함께 제기했다. 국민연금은 공개 중점관리 기업으로 지정하기 전까지 대상 기업명과 논의 내용, 대화 이후 개선 실적 등의 정보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어떤 기업이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으로 지정된 이후 약 2년 동안 기후 리스크 개선을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더라도, 외부에 있는 투자자 및 이해관계자들은 그 과정을 전혀 알 수 없다.
반면 해외 주요 연기금들은 투자 대상 기업에 기후 대응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뿐 아니라, 대상 기업명과 대화 과정 및 주요 성과까지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국민연금과 함께 세계 3대 연기금으로 꼽히는 ‘노르웨이 정부 연기금’(GPFG)의 경우, 포트폴리오 내 모든 기업들이 늦어도 2040년까지 ‘2050 넷제로’를 위한 목표 및 계획을 수립하여 직·간접 배출량을 감축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만약 기업이 적절한 노력을 취하지 않을 시 투자 철회, 주주권 행사, 이사회 구성 투표 등 후속조치를 취한다. 2024년에는 기후 관련 중점관리 기업 267곳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수행했으며, 중점관리 기업의 목록과 기업별 대화 주제는 웹사이트 및 보고서 등에 게시돼 있다.
‘네덜란드 공적연기금’(ABP)도 전력, 건설자재, 운송 등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산업을 우선적으로 저탄소 비즈니스 모델 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ABP가 2023년 한 해 동안 진행한 기업과의 대화 433건 중 절반 이상(233회)이 기후 및 환경 주제였으며, 노르웨이 연금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을 웹사이트 및 보고서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또한, 네덜란드 기업뿐 아니라 해외 기업을 대상으로도 주주 활동을 적극 수행하고 있는데, 2022년에는 ‘에너지 전환 계획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한전 채권을 매각하고 현대제철·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 10곳에 탄소 배출 감축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국민연금보다 해외 연기금이 오히려 한국 기업의 기후 리스크 관리에 선제적으로 나선 셈이다.
보고서는 국민연금이 실효성 있는 기후 리스크 관리를 위해선 △중점관리 기업을 확대하고 한전·포스코·현대제철 등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을 우선적으로 관리할 것 △해외 투자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해외 기업과의 대화를 강화할 것 △모든 과정에서 정보공개 범위를 확대할 것 △관여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필요 시 강력한 후속 조치를 이행할 것 등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보고서의 저자인 기후솔루션 기후금융팀의 황보은영 연구원은 “국민연금은 중점관리사안에 기후변화를 추가하고 최근 석탄투자 제한 정책을 도입하는 등 겉으로는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구체성과 실효성 측면에서는 여전히 해외 연기금에 비해 부족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의 노후 소득을 책임지는 사회 안전망이자 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세계 3대 연기금 중 하나로서, 국민연금은 기업의 기후위기 대응 강화를 유도하여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끄는 것과 함께 국민연금의 장기적인 수익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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