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온실가스 누적 배출 1위 기업군 상대 첫 농업 피해 손해배상 청구
기후위기로 농업 기반 붕괴…“기후위기 책임을 인정하고 손해를 배상해야”
원고 농업인 6명, 재산 피해 일부와 상징적 위자료 ‘2035원’ 청구…2035년 탈석탄 촉구 의미 담아

12일 국내 농업인 6명이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와 5개 발전 자회사를 상대로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위온, 기후솔루션)을 제기하고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소송은 국내 온실가스 누적 배출 1위 한전 및 발전 자회사를 상대로, 농업 분야 기후피해에 대해 직접 법적 책임을 묻는 첫 민사소송 사례다. 원고 측은 이번 소송이 단순한 손해배상 청구를 넘어,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 구조를 배출원에 근본적으로 묻고, 기후 취약계층인 농업인을 포함한 국민들의 생존권과 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한 상징적 순간이라고 밝혔다.
농업은 기후조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산업으로, 계절 주기와 기상 패턴의 안정성이 생존과 직결된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간 한반도에선 1912~1940년 평균 대비 최근 30년(1991~2020년) 평균기온이 1.6℃, 강수량은 135.4㎜ 증가했다. 폭염·가뭄·집중호우·냉해 등 이상기상 현상이 빈발하면서 재배 가능 작물의 범위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사과와 복숭아는 재배 적지가 북상하고, 벼는 병충해와 수확기 변동으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감귤은 제주를 넘어 본토에서까지 재배가 가능해졌지만, 오히려 제주산 감귤의 품질·가격 경쟁력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산청 지역 딸기농가는 산불과 폭우 피해가 반복되며 생산 기반 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발언 중인 기후솔루션 김예니 변호사
기후솔루션 김예니 변호사는 “농업인은 기후위기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이지만, 그 피해 책임은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한 발전 공기업에도 있다”며 “피고들은 국내 누적 배출의 약 27%, 전 세계 배출의 0.4%를 차지하면서도 재생에너지 전환을 미루고 해외 석탄 투자까지 확대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 소송이 “국제·국내 규범 위반에 대한 책임을 국내 법원이 판단하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경남 함양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원고 마용운 씨는 “4월 말이나 5월 초에 피던 사과꽃이 4월 초에 피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러운 눈과 추위로 얼어 수확이 망치는 일이 잦아졌다”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귀농했지만 농사를 더는 이어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농업인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후위기 책임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충남 당진의 벼농가 황성열 씨는 “병충해와 잦은 강우, 폭염 피해가 해마다 심해지고 있다”며 “수확량이 줄고 품질이 떨어져 생계가 위태롭다”고 말했다. 그는 “농업인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계속 떠안게 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한 소송”이라고 강조했다.

발언 중인 원고 마용운 씨

발언 중인 원고 황성열 씨
또다른 원고인 제주 서귀포에서 감귤농사를 짓는 윤순자 씨는 기온 상승으로 제주산 감귤의 경쟁력이 떨어짐을 겪었다. 경기 이천과 경북 영덕에서 복숭아농사를 짓는 송기봉·김수옥 씨는 기후변화로 복숭아순나방이 창궐해 나무를 베어내야 했으며, 개화와 착과 불량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겪고 있다. 경남 산청의 딸기농가 농부인 이종혁 씨는 폭우로 딸기하우스가 물에 잠기는 큰 피해를 받았다.
기자회견문에서 원고 측은 “이번 소송은 몇 명의 농업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만든 자들이 끝내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라며 “기후위기 책임 인정과 피해 배상, 온실가스 감축 계획의 수립과 실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원고들은 피해 복구를 위한 노력과 비용이 농민 개인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피고들의 법적·도덕적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전과 발전 자회사들은 2011~2022년 동안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의 연평균 23~29%를 차지했고, 이는 세계 누적 배출량의 약 0.4%에 해당한다. 피고의 전체 발전량 95% 이상이 화력발전에 의존하며, 석탄 발전 비중만 71.5%에 이른다. 국제사회가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추진하는 가운데, 국내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9.5%에 불과하며, 공기업들은 재생에너지 직접 확대보다 REC(재생에너지 인증서) 구매에 의존해 의무를 충족해 왔다. 원고들은 이러한 구조가 국제적 기후목표 달성 노력과 국가의 국민 보호의무를 기후위기의 차원에서 구체화한 탄소중립기본법의 취지를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한전과 발전 자회사들은 국가 전력 공급이라는 공기업의 책무를 수행해 왔지만, 이는 과도한 온실가스 배출 책임을 면제하는 사유가 될 수 없다. 발전 포트폴리오 구성,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및 전력규칙 개선, 석탄발전소 조기 폐쇄와 같은 결정은 정부 방침과 별개로 기업 경영 판단으로 가능한 사안이다. 덴마크의 오스테드(Ørsted), 스웨덴의 비텐팔(Vattenfall) 등 해외 공기업 전력사들은 구조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일한 공적 책무 속에서도 전환을 주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 지침에 따랐다는 이유 등 외부 영향으로 감축을 지연하거나 배출을 지속한 것은 한전이 책임을 면제받을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기후위기 대응의 선도 역할을 방기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재난 피해액을 어떻게 정량화하는지는 최근 학계에서도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지난 4월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된 크리스토퍼 캘러한(Christopher Callahan)과 저스틴 맨킨(Justin Mankin) 교수의 연구는 전 세계 111개 주요 다배출 기업의 누적 온실가스 배출량을 정밀 분석했다. 연구진은 각 기업의 100년간 배출 데이터를 토대로 평균 기온 상승 기여도와 이에 따른 폭염에 한정한 기후재난 피해액을 산정해 종단으로 연결하는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이로써 기업별 누적 배출량이 개별 재난 피해의 일정 비율을 설명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기후솔루션 분석 결과, 이 연구 방법론으로 한전 발전 자회사들의 2011~2023년 배출량 기준 손실기여액은 98.1조 원에 이르렀다. 원고 측은 이 연구를 근거로, 피고들이 전 세계 누적 배출량의 약 0.4%를 차지하는 만큼 기후위기에 따른 농업 피해의 상당 부분에 법적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번 소송 청구에는 재산 피해액 중 피고들의 전 세계 배출 기여도에 해당하는 금액과 상징적 위자료 2035원이 포함됐다. ‘2035원’에는 현 정부의 2040년 탈석탄 목표보다 앞선 2035년까지의 석탄발전 퇴출 요구가 담겼다. 원고 측은 G7의 2035년 탈석탄 합의를 언급하며, “세계적 흐름에 맞춘 조기 탈석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소송이 법원이 기후위기와 기업 배출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첫 판례로 자리 잡는다면, 이는 국내외 기후소송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동시에 고탄소 중심의 산업 구조 전반에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어, 기업과 정책 당국이 온실가스 감축 계획과 재생에너지 전환을 보다 실질적으로 강화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탄소중립 시대에 걸맞은 구조적 변화를 점진적으로 준비해 나가는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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