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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있는 배출자들

발행일
2026-08-09

2편이 '국가'의 책임을 물었다면, 3편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지난 편에서 우리는 국가 단위의 책임을 살펴봤어요. 누적 배출량의 60% 이상이 선진국에서 나왔지만, 피해는 다른 곳에 집중된다는 이야기였죠.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놓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미국이', '유럽이', '한국이'라고 말하는 순간, 책임은 흐릿해져요. 국가는 5천만 명이 뭉뚱그려진 이름이니까요. 그 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살고, 그중 누군가는, 또는 어떤 법인은 수익을 위해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양의 온실가스를 뿜어왔습니다. 화석연료 기업과 에너지 저소득층을 하나의 국가로 뭉뚱그리는 게 허술한 이유죠.

이제 그 굴뚝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볼 차례입니다.

'탄소 책임'이라는 새로운 언어

최근 국제 학계에서 '탄소 책임(Carbon Liability)'이라는 개념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기업별 누적 배출이 기후에 미친 영향을 계량화하고, 이를 법적·재정적 책임 논의로 연결하는 흐름이에요.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논문이 2025년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린 캘러핸(Callahan)과 맨킨(Mankin)의 연구입니다. 이 연구는 온실가스 배출과 기후피해가 경제적 손실 및 배상의 영역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지금까지 "당신 회사가 배출한 온실가스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봤다"는 주장은 심증에 가까웠습니다. 지구 전체가 하나의 대기를 공유하니, 특정 기업의 배출이 특정 피해로 이어졌다는 인과를 끊어 말하기 어려웠거든요. 이 '연결 고리 없음'은 오랫동안 배출 기업들의 방패였어요.

캘러핸과 맨킨의 방법론은 이 방패에 균열을 냅니다. 기업이 배출한 누적 온실가스 → 그로 인한 전 지구 기온 상승분 → 그 기온 상승이 초래한 경제적 손실을 단계적으로 계산해, 마지막에 '이 기업의 배출로 인한 손실은 얼마'라는 숫자를 뽑아내거든요.

즉, '누적 배출'이 도덕의 언어에서 회계 장부의 언어로 옮겨가고 있는 겁니다.

한국의 10대 배출 기업, 그 이름과 숫자

기후솔루션은 이 방법론을 한국에 적용했습니다. 국내 상위 10대 배출 기업의 2011~2023년 실측 배출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들의 배출이 초래한 폭염 손실기여액을 계산한 거예요.

결과는 이렇습니다.

상위 10대 기업의 13년간 누적 배출량은 약 41억 톤(tCO₂eq). 같은 기간 국내 전체 배출량의 43.5%입니다. 10개 회사가 한 나라 배출의 절반 가까이를 만들어냈다는 뜻이죠.

이 배출로 인한 폭염 손실기여액은 약 1,196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61조 원입니다.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면 이래요.

  • 포스코 한 곳: 약 281억 달러 (약 38조 원)

  • 한전 발전 자회사 5곳 합계: 약 729억 달러 (약 93조 원)

161조 원이라는 숫자가 잘 와닿지 않는다면, 2026년 기후대응기금 규모가 약 2.9조 원이라는 점과 비교해 보세요. 우리가 기후위기에 대응하겠다며 1년에 쓰는 돈의 50배가 넘는 손실이 지난 13년간 10개 기업의 굴뚝에서 나왔습니다. 그것도 여러 기후재난 가운데 '폭염' 하나만 따졌을 때 말이죠.

이 이름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요?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어요. 이 명단에 오른 이름들, 우리가 앞선 시리즈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전이 다 하는 나라' 시리즈에서 우리는 한전이 발전·송전·배전·판매를 모두 쥔 구조를 살펴봤어요. 그 한전의 발전 자회사 5곳이, 지금 이 명단에서 93조 원이라는 손실기여액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석탄 발전 자산을 30~40년 더 굴릴 수도 있는 바로 그 회사들이죠.

포스코는 또 어떻습니까. 국내 철강 산업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의 14~18%를 차지하고, 그중 대부분이 석탄 기반 고로에서 나옵니다. 38조 원이라는 숫자는 그 고로가 13년간 만들어낸 청구서인 셈이에요.

구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누가 그 구조에서 이득을 보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연구는 그 질문에 이름과 금액으로 답합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에요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161조 원은 사실 최소치에 가깝다는 것이에요.

이 분석에는 세 가지 보수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 폭염만 계산했습니다. 홍수, 가뭄, 산불, 태풍은 포함되지 않았어요. 이것들을 다 더하면 손실 규모는 훨씬 커집니다.

둘째, 1990년 이후의 누적 배출만 따졌습니다. 산업혁명 시점인 1850년 이래 누적배출을 기준으로 하면 손실 계수는 약 1.5배 상승해요.

셋째, 2011~2023년이라는 13년 창만 봤습니다. 이 기업들은 그 이전에도 온실가스를 배출해왔죠.

그러니까 161조 원은 "이 정도는 확실하다"는 하한선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청구서

과거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연구는 2025년부터 2050년까지의 미래 시나리오도 계산했어요.

지금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는 '현행정책' 경로로 가면, 누적 손실은 약 700조 원에 이릅니다.

반면 '탄소중립' 경로를 밟으면 누적 손실은 약 276조 원으로 줄어들어요.

차액은 약 420조 원. 이만큼이 '지금 감축하면 피할 수 있는 손실'이에요.

감축이 '비용'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들은 정반대를 가리켜요. 감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비싼 선택이라는 것이죠. 420조 원이라는 회피 가능한 손실 앞에서, 감축은 지출이 아니라 회수입니다.

숫자가 생기면, 세상이 달라진다

이 연구의 진짜 의미는 161조 원이나 424조 원이라는 액수 자체에 있지 않아요. 숫자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에 있습니다.

숫자가 생기면 세 가지가 달라져요.

첫째, 법정에서 다툴 수 있게 됩니다. 손해배상 소송에는 '누가', '얼마만큼의' 손해를 끼쳤는지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기후 소송이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이 인과의 사슬을 잇지 못해서였어요.

둘째, 투자자가 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잠재적 배상 책임은 곧 재무 리스크예요. 기업의 누적 배출이 금액으로 환산되는 순간, 그것은 대차대조표 바깥에 숨어 있던 부채가 됩니다.

셋째, 논의의 자리가 바뀝니다. '착한 기업이 되자'는 권유가, '진 빚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요구로 바뀌어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

우리는 오랫동안 기후위기를 주어 없는 문장으로 말해왔습니다. "기온이 올랐다", "재난이 늘었다", "지구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저절로 오른 기온은 없습니다. 모든 온실가스에는 배출한 굴뚝이 있고, 모든 굴뚝에는 이름이 있어요.

지금까지 이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셀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셀 수 있게 됐고, 세어보니 10개 기업이 한 나라 배출의 43.5%를, 그리고 161조 원의 폭염 손실을 만들어냈어요.

물론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에게만 청구서를 들이미는 것 아닌가?" 온실가스 배출은 한국 기업뿐 아니라 세계 모든 굴뚝의 공통 책임입니다. 캘러핸과 맨킨의 원 논문은 서구의 주요 화석연료 기업(Carbon Major)의 책임까지 계산했는데, 최다 배출 기업인 셰브론 한 곳의 책임만 최대 3조6000억 달러(약 4858조 원)에 달합니다.

핵심은, 유럽·한국·세계 모든 곳의 폭염에는 원인이 있고, 그 책임을 계산하는 방법론이 이제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이에요. 이제 남은 건, 그 방법론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다음 마지막 편에서 이미 도착한 피해와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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