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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다

발행일
2026-08-09

편집자
정유진

1.5도? 중요한 숫자인가요?

지구 평균기온이 1.5도 넘는다고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말하는 이야기, 처음 들으면 좀 이해가 안 갑니다. 한국의 여름과 겨울의 평균 기온차만 25~30도 안팎인데도 멀쩡히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1.5도는 사실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25도인 날과 26.5도인 날의 차이라고 해봤자, 밖에 나가서 정확히 맞힐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오늘이 어제보다 1.5도 덥다고 세상이 무너질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기후위기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전 세계가 그렇게 난리인데 이유가 겨우 1.5도라고?"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1.5도와 과학자들이 말하는 1.5도가 전혀 다른 숫자라는 데 있습니다.

1.5도는 서울의 기온이 아니다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세계는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평균'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숫자는 서울도 파리도 뉴욕도 아닙니다. 북극의 영하 수십 도와 적도의 40도를 모두 포함해 계산한 전 지구 평균기온의 상승폭이에요.

우리가 1.5도를 별것 아니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평균이라는 숫자는 원래 극단을 지웁니다. 평균 연봉이 빈부격차를 보여주지 않고, 평균 집값이 동네별 차이를 지우듯이요.

평균이 1.5도 올랐다는 말 뒤에는 훨씬 큰 변화가 숨어 있습니다. 원래 기후는 매년 비슷한 범위 안에서 움직여요. 그 범위에 맞춰 우리는 옷을 사고 건물을 짓고 농사 일정을 잡습니다. 그런데 평균이 이동하면 그 범위 자체가 통째로 밀려 올라가요. 곡선이 조금만 밀려도 양쪽 끝, 즉 극단적인 날씨의 빈도는 훨씬 큰 폭으로 늘어납니다. 예전에 수십 년에 한 번 오던 폭염이 이제는 몇 년에 한 번 옵니다. 우리가 실제로 겪는 건 평균이 아니라 이 극단값입니다.

기후위기, 우리가 몰랐던 것

기후위기는 지금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어요.

동아프리카에서는 수년 째 이어진 가뭄으로 농경지가 말라가고 가축 수백만 마리가 폐사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2022년 대홍수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며 수천만 명이 피해를 입었죠.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는 해수면 상승 때문에 국가 자체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뉴스에 나와도 우리에겐 남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집 앞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다릅니다. 지대가 낮은 반지하에 물이 잠겨 이웃이 사망하는 소식, 지하주차장이 잠기고 다리 밑이 물에 잠기는 풍경. 매년 여름 우리 뉴스는 이런 장면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어쩌면 피해가 처음 발생했을 때가 아니라, 그 피해가 '우리 이야기'와 '선진국 뉴스'의 헤드라인에 오르기 시작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럽, 원래 이렇게 더운 곳 아니었잖아요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풍경이 유럽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서유럽은 관측 이래 가장 더운 6월을 기록했고, 프랑스와 영국 역시 역대 최고 수준의 6월 기온을 경험했어요. 스페인 일부 지역에선 45도를 넘는 폭염이 기록됐고,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기온 기록이 새로 쓰였습니다.

한국 사람 입장에선 35도, 38도가 아주 낯선 숫자는 아니에요. 매년 여름 겪는 온도니까요. 그런데 유럽의 폭염 뉴스가 충격적인 이유는 단순히 숫자 때문이 아닙니다. 유럽이 원래 그런 더위를 견디도록 설계된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어컨 없는 집이 흔하고, 선선한 여름을 전제로 건물을 짓고 철도를 놓았던 지역이 갑자기 다른 기후를 마주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더위는 실제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6월 하순 단 일주일 새 유럽에서 1,300명 이상이 고온으로 숨졌다고 발표했어요. 폭염이 열흘 넘게 이어진 프랑스에선 장례시설이 포화될 정도로 사망자가 몰렸고요.

유럽에서 사람이 죽은 이유는 낮의 더위 때문만이 아닙니다. 밤에도 실내 온도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낮 동안 쌓인 열을 몸이 밤새 회복하지 못하고, 그 상태가 며칠 이어지면 사람이 죽습니다. 에어컨이 없는 집이 많다는 게 이때 치명적인 문제가 되죠.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연구소에 따르면 2026년 6월 서유럽 평균기온은 20.74도로, 1991~2020년 평균보다 3도 이상 높은 관측 사상 최고치였습니다. 종전 기록은 2025년 6월이었어요. 2년 연속으로 기록이 깨진 겁니다.

문제는 날씨가 좀 더워진 게 아니라,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기후의 질서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는 데 있어요.

북미에서는 재난이 동시에 일어난다

대서양 건너편도 다르지 않습니다. 올여름 미국에서는 서부가 불타는 동안 중부가 물에 잠겼어요. 한 나라에서 동시에 벌어진 일이죠.

유타와 콜로라도 접경지에서는 산불로 비상사태가 선포됐습니다. 시속 70km 강풍을 타고 번지는 불길을 잡다가 소방관 세 명이 목숨을 잃었죠. 그 시각 중부 내륙에서는 홍수로 울타리가 통째로 사라지고 나무가 땅에서 뽑혀 나갔습니다.

범인은 열돔 현상입니다. 뜨거운 공기가 뚜껑처럼 갇혀 움직이지 않는 상태예요. 중부에 자리 잡은 거대한 열돔이 아래로 누르는 기류를 만들면서 서부의 수분을 쥐어짜듯 증발시켰습니다. 그렇게 바싹 마른 땅이 산불의 도화선이 됐고, 증발한 수증기는 열돔 가장자리로 밀려나 폭우로 쏟아졌어요. 한쪽을 태운 열기가 다른 쪽을 잠기게 한 셈입니다.

예전에는 폭염이면 폭염, 홍수면 홍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재해도 세트로 옵니다. 더워진 대기는 더 많은 수증기를 머금고 더 강한 폭우를 만들며, 동시에 가뭄과 산불 위험도 키웁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맞물려 나타나는 현상을 복합 재난(compound events)이라고 부릅니다.

7월 초, 독립기념일 연휴에 미 동부 기온이 38도를 넘어서면서 최소 25명이 숨졌습니다. 뉴저지주에서만 22명이었어요. 주 보건당국은 사망자 대부분이 에어컨 없는 집과 길거리, 주차된 차 안에서 발견됐다고 밝혔습니다. 에어컨이 없어 사람이 죽는 나라가 유럽만은 아니었던 겁니다.

한국도 예외 아님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올해는 장마와 폭염이 사실상 동시에 오는 '폭염 장마'가 이어지고 있어요. 비가 내리며 습도를 높이고, 곧이어 강한 햇볕이 체감온도를 끌어올리면서, 폭염특보와 호우특보가 같은 시기에 발효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밤 최저기온이 25도를 넘는 열대야 현상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는 게 기상청의 설명이에요.

우리가 어릴 때 알던 계절은 좀 더 단순했습니다. 장마가 오고,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오는 순서. 그런데 요즘 날씨는 그 순서를 무시합니다. 비가 퍼붓다가 갑자기 찌고, 찌다가 또 비가 내리고,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죠. 한때 이런 날씨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서울에서도 흔합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계절의 리듬이 통째로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1.5도의 의미

너의 그 한 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산울림 <너의 의미>


'너의 의미'라는 노래를 아이유의 목소리로 알게 된 세대가 있습니다. 아이유가 부른 건 리메이크고, 원곡은 1984년 산울림의 노래죠. 40년 전 노래가 다시 소환되는 시대에, 이 노래의 한 구절은 지금 이 이야기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에게 1.5도는 온도계 눈금 하나가 아닙니다. 폭염이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 되는 변화, 산불과 홍수가 같은 계절에 함께 오는 변화, 과거의 기후를 기준으로 지어진 도시와 사회가 더 이상 지금의 기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25도와 26.5도의 차이는 여전히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전 지구 평균기온이 1.5도 오른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바꾸고 있습니다. 어쩌면 1.5도는 작은 숫자가 아니라,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온 '평범한 날씨'가 실은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숫자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한 마디가 커다란 의미가 되는 것처럼, 지구에게는 1.5도라는 작은 변화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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