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시장정책 4

판매 - 선수와 심판이 한 몸일 때

발행일
2026-07-27

편집자
권오성

축구 경기를 본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라운드에서 공을 차는 선수가, 동시에 호각을 부는 심판이라면?

한국 전력시장의 모습이 딱 그래요.

발전소에서 태어난 전기가(1편), 송전탑과 전봇대를 거쳐(2·3편)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 우리가 매달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는 그 단계, 판매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단계에서도 어김없이, 한전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독특한 자리에서.

"이 전기, 제가 다 살게요"

한국에도 전기를 사고파는 도매시장이 있어요. 운영은 전력거래소(KPX)가 맡습니다. 발전소(한전 자회사, 민간 발전사)들이 "이 가격에 팔게요"라고 내놓으면, 누가 살까요?

한전입니다.

발전소가 만든 전기는 한전을 거쳐야만 우리 집까지 옵니다. 한 손에 다 쥐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전은 단순한 '큰손 구매자'가 아닙니다.

전기를 사는 최대 큰손이자, 발전 자회사들을 거느린 최대 공급자이자, 전력 정책을 사실상 설계하는 규칙 설계자.

선수, 심판, 그리고 룰 만드는 것까지 한 사람이 다 하는 셈이죠.

한전이 적자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구조의 함정은 한전이 적자에 빠질 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지난 몇 년 한전은 천문학적 적자에 허덕였어요. 2021년 말부터 2023년 초까지 누적 영업 손실 48조 원. 부채는 60조에서 120조로 두 배, 부채비율은 112%에서 619%로 여섯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2025년엔 잠깐 흑자(영업이익 13조 5,000억 원)였지만, 최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또 고유가·고환율 직격탄을 맞고 있어요. 200조 원 적자가 만들어내는 하루 이자가 114억 원입니다.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한전은 시간당 5억 원씩 이자를 갚고 있는 거예요.

한전의 적자는 누가, 어떻게 메울까요?

전기요금을 올리면 됩니다. 그런데 전기요금은 물가와 직결돼서 정부가 쉽게 못 올려요. 그러면 남는 길은? 비용을 줄이는 것.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적자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는데, 칼날은 엉뚱한 곳을 향하거든요.

한전이 사들이는 전기의 60%, 그러니까 석탄과 천연가스 구입비가 2021년 40조 원대에서 2022년 68조 원대로 폭증했어요. 이후에도 매년 50~60조 원대. 적자의 진범은 수입 화석연료 가격 폭등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비용 절감하겠다고 손대는 건 화석연료가 아니에요. 재생에너지 지원 예산입니다.

화석연료는 총괄원가 보상이니 용량요금이니 하는 옛날 제도들로 안정적인 보상을 받습니다. 반면 재생에너지 확대 재원은 '적자 시기엔 좀 줄여도 되는 항목'이 돼요.

선수이자 심판인 한전이, 자기와 한 몸인 화석연료는 지키면서 경쟁자인 재생에너지의 발목은 잡는 구조. 이게 '선수와 심판이 한 몸일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삼성도 못 사는 전기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전기를 사고 싶다고 나선 길목에도, 한전이 떡 하니 서 있어요.

요즘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선 'RE100' — 사용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채우겠다는 약속 — 이 거의 의무가 됐어요. 삼성전자도, SK하이닉스도 애플과 구글 같은 고객사 요구에 맞추려면 재생에너지 전기가 절실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거의 모든 전기가 한전을 거치는 구조라, "이거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예요" 하고 따로 사는 게 까다로워요. 이를 보완하려고 직접 PPA(전력구매계약), 제3자 PPA, 녹색 프리미엄 같은 제도들이 도입되긴 했죠. 하지만 들여다보면, 결국 한전을 중개자로 거치거나 한전의 약관에 묶여 있습니다.

기업들이 가장 많이 쓰는 '녹색 프리미엄' 제도를 기후솔루션이 들여다봤더니, 국제 표준조차 충족 못 하고 있었어요. 웃돈 주고 사면 재생에너지 사용으로 인정해주는 제도인데, 정작 그 전기가 진짜 재생에너지인지를 증명할 길이 없거든요. 영수증 없는 영수증 처리인 셈이에요.

세계 1등 반도체 기업들이, 자기 돈 내고 재생에너지 전기 사겠다는데 그게 안 되는 나라. 어떻게 가능할까요? 한 회사가 발전, 송전, 판매를 다 쥐고 있으니까요.

한전의 진짜 속내

최근 변화의 조짐이 있긴 합니다.

정부는 2026년 상반기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RPS)를 폐지하고 재생에너지 입찰제도로 전환할 계획이에요. 이렇게 되면 그동안 현물시장에 묶여 있던 재생에너지가 RE100 이행용 전력으로 풀려나옵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한전 산업용 전기요금이 kWh당 180원까지 올랐거든요.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가 이보다 싸게 부르면? RE100 기업들은 굳이 한전을 거칠 이유가 없어요. 직거래가 이득입니다.

여기서 한전이 정말 곤란한 자리에 놓여요.

재생에너지 거래가 활발해질수록, 한전의 판매 수익은 줄어듭니다. 시장의 최대 선수이자 규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는 회사가, 재생에너지를 키울 동기가 있을까요?

구조적으로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경기였나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선수가 동시에 심판인 경기, 그 경기는 공정할 수 있을까요.

  • 한전은 전기를 사는 최대 구매자입니다.

  • 동시에 발전 자회사를 거느린 최대 공급자입니다.

  • 그리고 전력 정책 설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 한전이 적자에 빠지면, 가장 먼저 재생에너지 지원이 흔들립니다.

  • 재생에너지 거래가 늘면, 한전의 수익은 줄어듭니다.

이 모든 이해관계가 한 회사 안에서 뒤엉켜 있는 한, 재생에너지가 공정하게 뛸 운동장은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

이제 문제의 전체 그림이 보일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다음 편에서, 이미 한 발 먼저 움직인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함께, 한국 전력시장을 다시 그릴 구체적인 길을 짚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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