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앤온리에서 멀티플레이어로
- 발행일
- 2026-07-27
- 편집자
- 김원상
발전소에서 태어나(2편), 전선을 따라 흘러(3편), 마지막에 한전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팔리는 전기(4편). 매 단계마다 같은 이름이 반복됐어요. 한전, 한전, 한전.
만들어도 멈추고, 흘려보내도 막히고, 팔려고 해도 안 되는 구조. 그 모든 게 한전 중심의 전력그룹이 사실상 네 단계를 다 쥐고 있기 때문이었죠.
2001년부터 발전 부문은 분리돼 있고 전력거래소가 시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전은 송전·배전·판매를 사실상 독점하고, 전력시장의 단일 구매자로 참여하며, 동시에 주요 발전 자회사 6곳을 100%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그릴 수 있을까요? 다행히 이 길을 먼저 걸어 본 나라들이 있어요. 5편은 '원앤온리' 한전 시대를 끝내고 전기가 다시 흐르게 할 구체적인 길을 짚어봅니다.
문제는 '나쁜 회사'가 아니라 '나쁜 구조'

오해부터 풀고 갈게요. 지금까지 이야기는 "한전이 나쁘다"가 아니었어요.
한 회사가 발전·송전·배전·판매를 다 쥐고 있는 그 구조 자체가, 누구를 그 자리에 앉혀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낼테니까요. 화석연료 발전소를 잔뜩 안고 있는 회사가 동시에 송배전망의 유일한 주인이고, 재생에너지가 들어설 자리까지 정한다면, 누가 그 자리에 가도 재생에너지 확대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일 동기가 없습니다.
손 볼 곳은 한 사람이 아니라, 네 단계가 한 회사 안에 묶여 있는 그 구조입니다.
4편에서 봤던 축구장 비유를 다시 떠올려 보세요. 그라운드에서 공을 차는 선수가 동시에 호각을 부는 심판이라면, 그 경기는 누구를 위한 경기가 되겠냐고요. 게다가 그 운동장 자체를 그 선수가 소유하고 있다면? 새로 들어선 다른 팀은 시작도 전에 진 경기를 하게 됩니다. 한국 전력시장이 지금 딱 그 모습이에요.
"그럼 한전을 쪼개자고? 전기는 공공이 책임져야 하잖아"
여기까지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를 의문이 있을 거예요.
"한전을 쪼개자고? 전기 같은 건 국가가 책임져야 하지 않나? 시장에 맡기면 결국 요금만 오르고 정전이 잦아지는 거 아닌가?"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중요한 질문이라 짚고 가야 합니다. 전기는 누구도 끊겨선 안 되는 필수재고, 시민이 함께 지켜온 자산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질문이니까요.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지금 이야기는 공공의 손을 떼자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손이 더 잘 작동하게 만들자는 이야기입니다.
'역할을 나누는 것'과 '자산을 파는 것'은 다른 일
흔히 한 묶음처럼 오해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는 한전이라는 한 회사가 발전·송전·판매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모두 끌어안고 있었던 게 문제였어요. 그 역할을 나누자는 건, 한전이라는 공기업의 외피를 깨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회사 안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엉키지 않도록 칸막이를 세우자는 거예요.
실제로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프랑스의 송전망 운영사 RTE는 EDF가 최대주주입니다. 하지만 EDF가 마음대로 전선 운영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별도 거버넌스를 두었어요. 핵심은 간단합니다. 전선은 특정 발전회사 편을 들지 않아야 한다. 이걸 '망 중립성'이라고 부릅니다.
영국도 2024년에 송전망 소유주와 별개로, 계통 계획·운영만 전담하는 공기업 NESO를 출범시켰습니다. 망 자체는 분리된 사업자가 갖고 있되, 시장의 심판 역할은 독립된 공공기관이 맡는 거예요.
단순 매각이나 시장 개방이 아니라, 공공과 민간이 함께 더 정교하게 일하는 방식. 한국이 따라갈 길도 같은 결입니다.
오히려 역할을 나눌수록 공공의 책임은 더 또렷해져요. 송배전망은 한 번 깔면 다른 회사가 똑같이 깔 수 없는 자산이라 반드시 공공이 소유·운영해야 해요. 다만 그 운영이 특정 발전회사의 이해관계에 끌려가지 않도록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죠. 시장에 맡기자는 게 아니라, 공공의 심판을 시장 위에 두자는 이야기입니다.
요금이 '싸 보이는' 진짜 이유
"분리하면 요금 오른다"는 우려도 솔직하게 답하겠습니다.
지금 전기요금이 싸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들어간 비용을 제때 요금에 반영하지 못했고, 그 차이가 한전의 빚으로 쌓였습니다. 한전 부채는 200조 원을 넘었어요(4편). 오늘 낮아 보이는 요금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내일의 요금과 세금으로 밀려난 셈입니다.
게다가 그 적자의 진짜 원인은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수입 화석연료 가격 폭등이었어요(4편). 호르무즈 해협에서 일이 한 번 터질 때마다 우리 전기요금이 출렁이는 이유죠. 재생에너지가 모든 비용을 없애주는 마법은 아니지만, 햇빛과 바람은 수입 연료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국제 가스값과 석탄값에 덜 흔들리는 전기요금 구조를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무엇을 바꿔야 할까
방향이 정해지면, 구체적으로 다섯 곳을 동시에 손봐야 합니다.
1) 송배전망 — 모든 발전소에 공평한 길
가장 먼저 손볼 곳은 송배전망입니다.
한전의 망 사업 부문(송전·배전)을 발전·판매에서 분리하고, 어떤 발전소에든 차별 없이 열린 망으로 다시 짜야 합니다. 전선에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어떤 기준으로 출력을 멈추게 하는지, 망 이용료는 어떻게 매기는지가 특정 사업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지 않도록 '망 중립성' 원칙을 법으로 못 박는 것이 핵심이에요.
원칙 하나를 더해야 합니다. 다른 발전소보다 재생에너지가 먼저 전선에 연결될 수 있는 권리, 즉 우선 접속 원칙이요. 특히 석탄발전 폐지로 비는 자리(3편 충남 사례)가 가스발전으로 자동 채워지는 일은 막아야 해요. 그 자리에선 재생에너지도 공정한 기회를 받아야 합니다.
2) 발전 — '꺼지지 않는 화력'의 보장을 줄이자
2편에서 봤죠. 한국 화력발전소가 "최소한 이만큼은 돌려야 한다"고 정해둔 하한선이 50~60%로, 국제 권고치(30~40%)보다 유독 높다는 사실. 이 숫자를 일본·중국 수준으로 낮추기만 해도 재생에너지가 들어설 자리가 단번에 넓어집니다.
여기서 처음 짚을 한 가지가 더 있어요. '열'도 원인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LNG 열병합발전소는 지역난방 열을 공급해야 해서 햇빛이 많은 낮에도 멈추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발전소가 '내 사정상 이 시간엔 못 끄겠다'고 스스로 신고하는 제도가 있어요. 이걸 '자기제약' 이라고 불러요. 한국에서는 이 자기제약을 사유로 발전이 보장되지만, 해외 주요국은 그렇지 않아요. 히트펌프, 전기보일러처럼 열과 전기의 시간을 나눠 쓰는 기술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솔루션 분석으로는, 2025년 3월 9일 낮 시간의 자기제약 발전량만 빼도 그날 출력제어가 사실상 발생하지 않을 수준이었어요. 멈추지 않아도 될 발전기 때문에 멈출 필요 없는 재생에너지가 멈추고 있는 셈입니다.
3) 시장 — 제값 받는 재생에너지, 제값 받는 유연성
지금 한국 전기 도매시장은 그 시간에 돌아간 발전기 중 가장 비싼 발전기 가격에 맞춰 모두에게 똑같이 정산해주는 구조예요. 이걸 변동비기반시장(CBP)이라고 부릅니다. 연료비가 거의 들지 않는 재생에너지가 제값을 받기 어려운 구조죠.
이걸 보완하려면 세 가지가 같이 들어와야 합니다.
차액계약제도(CfD) — 재생에너지 사업자에게 "일정 가격은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해, 시장 가격이 들쭉날쭉해도 예측 가능한 수익을 만들어주는 제도. 사업자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게 합니다.
가격입찰제(PBP) — 모든 발전소가 자신의 가격을 직접 써내서 입찰하고, 그 가격대로 거래되는 구조로 시장을 바꾸는 일.
실시간·보조서비스 시장 —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푸는 ESS(에너지저장장치), 여러 작은 발전 자원을 묶어 하나처럼 운영하는 가상발전소(VPP), 전기 사용을 줄여 공급에 기여하는 수요반응(DR) 같은 유연성 자원이 계통 안정에 도움을 준 만큼 정당하게 보상받는 자리.
재생에너지의 약점인 '바람과 햇빛이 늘 같지 않다'는 빈틈을, 이 유연성 자원들이 메웁니다. 그 역할에 대한 대우도 어느 정도 뒷받침돼야 에너지 전환이 가속됩니다.
4) 거버넌스 — '심판'을 따로 두자
지금 한국 전력시장에는 독립적인 심판이 없어요. 한전이 선수이자 심판이고, 규칙도 같은 식구가 만들고 있습니다(4편).
금융시장에 금융감독원이 있듯, 전력시장에도 한전과 분리된 독립 감독기구가 필요합니다. 이름을 붙이자면 '전력감독원'. 그리고 전력 관련 규제를 맡고 있는 전기위원회의 실질적인 독립성도 함께 강화해야 해요.
출력제어가 정말 공정하게 이뤄졌는지
어떤 발전소가 왜 먼저 줄을 섰는지
망 이용료가 어떤 근거로 매겨졌는지
누군가는 이걸 들여다보고,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한전이 망 이용료 산정 방식조차 공개하지 않는 '깜깜이' 구조는, 재생에너지를 발전 사업자로부터 직접 사고 싶어 하는 기업들(이런 직거래를 PPA, 전력구매계약이라고 합니다)의 발목까지 잡고 있어요.
기후솔루션이 한전을 상대로 계통관리변전소(=전국에서 출력제어를 실제로 명령하는 거점 변전소) 정보공개거부 취소소송을 낸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어디가 왜 막혔는지 모르면, 문제를 고칠 수도 없으니까요.
5) 보급 — 주민이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이 되게
마지막은 발전소가 들어서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를 정하는 방식입니다.
지금까지 재생에너지 사업은 사업자가 부지를 알아서 찾고, 주민과 부딪치고, 갈등이 폭발한 다음에야 인허가가 멈추는 패턴이었어요. 너무 늦죠.
그래서 등장한 게 계획입지 제도입니다. 국가와 지자체가 적합한 입지를 미리 정하고, 사업 초기부터 주민과 정보·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이에요. 발전소에서 나오는 수익 일부가 동네 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설계된 햇빛소득마을 같은 주민참여형 모델도 같은 결입니다.
발전소가 들어선 마을이 단순한 '피해 지역'이 아니라, 그 전기를 함께 만드는 '동업자' 가 되는 것. 100GW도, 주민 수용성도, 결국 이 한 단어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전기가 흐르게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가 켜집니다. 너무 당연해서 아무도 묻지 않던 그 너머에는, 한 회사가 모든 길을 쥐고 있는 시장이 있었어요.
햇빛이 쨍쨍한 날 강제로 꺼지는 태양광, 줄만 서다 늙어가는 풍력 사업자, RE100을 못 맞춰 수출길에 위기를 맞은 반도체 공장, 그리고 매일 이자를 갚고 있는 한전. 모두 같은 구조에서 나온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원앤온리' 한전 시대를 끝낸다는 건, 공공의 책임을 내려놓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망 중립성, 우선접속, 차액계약제도와 가격입찰제, 독립 감독기구, 계획입지 — 발전소도, 전선도, 시장도, 정책도 공공·민간·시민·지역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규칙 안에서 일하는 시장으로 다시 그리자는 이야기예요.
<한전이 다 하는 나라> 시리즈는 여기서 마칩니다. 다음에 스위치를 누르실 때, 그 너머가 조금은 다르게 보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꾸는 일은,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