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는 굴뚝에서 멈추지 않는다
- 발행일
- 2026-09-20
- 편집자
- 이우영
1990년대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떠올려볼까요. 겨울이면 임직원들이 모여 연탄을 나르고, 회사는 장학재단을 세우거나 재난 성금을 냈습니다. 번 돈의 일부를 사회에 돌려주는 게 책임 있는 기업의 정석이던 시절이죠. 그때의 질문은 하나였어요. "사회를 위해 무엇을 더 했는가?”
지금은 질문의 결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기부금을 얼마나 냈느냐 못지않게,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를 훨씬 까다롭게 따집니다. 제품 하나 만들 때 온실가스가 얼마나 나오는지, 그걸 줄이려 어떤 기술에 투자하는지, 말로만 탄소중립을 외치며 뒤로는 고탄소 사업을 그대로 쥐고 있진 않은지. 기업 책임의 무게중심이 '기부금 장부'에서 '설비투자 장부'로 옮겨간 겁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기업의 기후 책임, 이게 정말 환경만의 문제일까요?"
처음엔 그래 보입니다. 온실가스라고 하면 왠지 환경부나 시민단체의 영역 같으니까요.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오늘 어떤 설비에 투자하느냐가 10년, 20년 뒤 어떤 공장이 돌아갈지를 정합니다. 제품을 어떻게 만들지, 에너지를 얼마나 쓸지를 넘어, 기업이 살아남을 전략 그 자체를 좌우하는 선택이죠. 기업을 둘러싼 기후 논쟁이 환경을 넘어 투자와 공급망,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 판이 커진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장이 요구하는 기업의 배출 책임,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탄소는 굴뚝에서 멈추지 않는다
예전엔 우리 공장에서 나온 탄소만 잘 관리하면 그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탄소는 굴뚝을 넘어 공급망 전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기업의 배출을 보통 세 범위(Scope)로 나눠 봅니다.
Scope 1: 우리 공장에서 직접 기름을 때거나 제품을 만들 때 나오는 직접배출
Scope 2: 남이 만든 전기나 에너지를 사서 쓸 때 발생하는 간접배출
Scope 3: 원자재 조달부터 운송, 소비자가 제품을 쓰고 버릴 때까지 가치사슬 전체에서 나오는 배출
Scope 1과 2는 직관적입니다. 우리 공장, 우리가 쓴 전기니까요. 진짜 쟁점은 Scope 3에서 터집니다. 기업들은 오랫동안 억울하다는 듯 물어왔어요.
"우리가 만든 제품을 남이 쓰면서 나오는 탄소까지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까?"
그럴듯한 항변 같죠. 그런데 시장은 이제 반대편에서 되묻습니다.
"직접 통제하지 않는 배출이라고 해서, 그게 정말 당신들의 사업 전략이나 제품 선택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철강회사의 탄소는 누구의 것일까
철강산업을 보면 이 문제가 선명해집니다. 포스코가 철광석을 녹여 철강을 만들 때 나오는 탄소는 포스코의 직접배출(Scope 1)입니다. 그런데 그 철강을 현대자동차가 사서 차를 만들면, 똑같은 그 탄소가 현대차에게는 공급망 배출(Scope 3)이 됩니다. 한 덩이 탄소에 붙는 꼬리표만 바뀌는 셈이죠.
전기차를 볼까요. 도로에선 탄소를 거의 뿜지 않지만, 그 차의 뼈대인 철강과 심장인 배터리를 만들 때 온실가스가 쏟아졌다면 어떨까요. 공급망 전체로 보면 '깨끗한 차'라는 말은 절반만 진짜입니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가 진짜 탄소를 줄이려면, 차를 전동화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차를 이루는 소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까지 챙겨야 하죠.
자동차 회사의 탄소중립 계획이 철강사의 생산 방식과 직결되는 이유입니다. 철강사가 저탄소 철을 못 만들면 자동차 회사도 Scope 3를 줄일 수 없고, 반대로 자동차 회사가 저탄소 소재만 고집하면 철강사도 설비와 에너지원을 바꿔야 하니까요.
이제 탄소는 굴뚝 밖으로 나간다고 사라지는 숫자가 아닙니다. 공급자에겐 직접배출, 고객사에겐 공급망 배출, 투자자에겐 재무 위험, 정부에겐 통상정책의 변수가 됩니다. 한 기업의 배출이 다른 기업의 배출로 이어지며, 서로의 경영계획이 한 줄로 꿰이는 겁니다.
투자자와 시장이 Scope 3를 보는 이유
이렇게 공급망이 얽히자 투자자와 규제기관의 눈빛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너희 공장에서 얼마나 나오니?"를 물었다면, 요즘은 "너희 공급망 전체의 기후 위험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데?"를 묻습니다. 공급망 구석에 숨은 위험이 머잖아 기업 가치와 수익성을 때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제도도 같은 방향입니다. 유럽연합은 기업 지속가능성 공시지침(CSRD)으로 기후 정보 공개를 조이고 있고,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도 가치사슬 전반의 기후 위험을 투자 판단의 핵심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한 이름보다 중요한 건 하나예요.
시장의 게임 규칙이 바뀌었다는 사실.
이제 "우리는 깨끗해요"라는 말만으론 부족합니다. 공급망 어디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그걸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숫자로 증명해야 합니다.
기업 책임의 선은 어디까지일까
이 변화는 실사 규제에서 가장 뚜렷합니다. 유럽연합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은 기업에 자사 사업장은 물론 협력업체와 가치사슬 전반의 인권·환경 위험까지 파악하고 해결하라고 요구합니다.
기업은 "공급망 전체를 어떻게 다 통제하느냐"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시장은 이미 책임의 경계를 공장 담장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어떤 거래처와 일하고, 어떤 원료를 쓰며, 공급망의 위험을 얼마나 파악하고 관리하는지가 모여 그 기업의 진짜 값어치로 평가받는 시대예요. 자기 배출량만이 아니라, 그 탄소가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과 구체적인 감축 로드맵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숫자를 보고 고객사는 거래를 이어갈지 정하고, 투자자는 장기 위험을 계산하며, 정부는 무역 장벽을 세웁니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기업 책임의 경계선은 이미 공장 담장을 한참 넘어선 겁니다.
세계 시장에서는 이 변화가 이미 현실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왜 완성차 기업들과 글로벌 시장이 저탄소 철강을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한국 철강산업에 어떤 묵직한 숙제를 던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