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삼성전자가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선언했지만, 불과 6개월 뒤 정부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전력 공급 계획을 3GW 규모 LNG 발전소 건설로 발표했습니다. 이미 수도권에는 27GW의 LNG 발전소가 가동 중인데, 또다시 화석연료 발전을 늘린다는 건 탄소중립 목표와도 맞지 않고, 글로벌 고객사들의 재생에너지 요구와도 충돌합니다.
특히 이 사업이 한국전력 주도로 진행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기존처럼 중앙집중형 전력 시스템을 고수하려는 한전과, RE100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를 원하는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지점이 드러난 것이죠.
결국 문제는 어떤 데에 지출을 해서 투자를 해야하냐, 즉 돈의 흐름입니다. 지금처럼 대형 발전소를 중심으로 한 오래된 전력시장 구조에서는 재생에너지와 분산형 자원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새로운 전력 시장, 그리고 가상발전소(VPP, Virtual Power Plant) 같은 혁신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분산형 전력 시스템 전환에 담긴 3가지 혁신
재생에너지 확대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전력 시스템 자체의 혁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양방향 전력 시스템
기존에는 대형 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해 일방적으로 공급했습니다. 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고 산업과 가정은 단순히 그 전기를 받아 소비하는 단순한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ESS(에너지저장장치), 전기차까지 분산형 자원이 늘어나면 공급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이제는 전기를 생산하기도 하고, 저장했다가 다시 공급하기도 하는 양방향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내 전기차에 충전해놓은 에너지로 집 에어컨을 돌릴 수 있다거나, 저렴할 때 충전해둔 가정용 ESS를 비쌀 때 전력시장에 판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IT 기반 통합 관리
수많은 분산형 자원을 개별적으로 관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과거엔 발전소가 몇 십개에 불과했고, 전력시장에 참여한 숫자가 제한적이었다면, 이제는 분산형 시스템에 맞게 중소형 발전소들이 많아지고, 개인까지도 시장에 참여하게 되어 시장이 확대되고 복잡성이 증대됩니다. 그래서 IT 플랫폼을 통한 통합·관리 서비스가 필수적입니다. IT 기술이 접목되면서 소비자도 실시간 데이터를 확인하고 직접 에너지 관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수요 반응형 시스템
지금까지는 수요에 맞춰 무조건 공급을 늘렸습니다. 오로지 수요에 따라 발전소들을 얼마나 가동할지 결정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수요를 조정해 공급과 맞추는 방식이 가능해집니다. 수요가 너무 집중되지 않도록 분산하도록 하는 것지요. 피크 시간대에 수요를 줄이게 된다면 연중 수요가 크게 몰릴 때 몇 번 돌리지도 않는 화력발전소를 짓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죠.
VPP: 분산형 전력의 게임체인저
전통적인 화력발전 기업이 이런 혁신을 이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가상발전소(VPP)입니다.
VPP 사업자는 IT 기술을 기반으로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ESS(배터리 저장장치), 그리고 전력 수요를 줄일 수 있는 자원들을 모아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발전소처럼 묶어 운영합니다. 쉽게 말해, 여러 집에 있는 작은 태양광 패널과 배터리를 모아 ‘가상의 발전소’를 만드는 셈입니다. 이렇게 하면 분산형 자원이 많아져도 전력망이 불안정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VPP 기업들은 지금 큰 벽에 막혀 있습니다. 이유는 전력시장이 화력발전 위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보상 체계는 석탄·가스처럼 연료를 태워야 돈을 버는 구조라, 연료비가 들지 않는 태양광·풍력·배터리 같은 자원은 제값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의 VPP를 도식화한 가상의 이미지
예를 들어 ESS(배터리)는 전기가 남을 때 저장했다가 필요한 순간에 빠르게 꺼내 쓸 수 있습니다. 반면 가스발전은 시동을 걸고 멈추는 데 시간이 걸리죠. 두 자원의 역할과 강점이 전혀 다르지만, 시장의 기준은 여전히 “연료비와 가동시간” 같은 가스발전 잣대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 배터리의 장점이 가려지고, 기업들이 투자할 유인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전력시장은 화석연료 발전소에는 유리하고, 새로운 분산형 자원에는 불리하게 짜여 있는 셈입니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VPP는 활성화되기 어렵고, 재생에너지 확대도 제 속도를 내지 못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후솔루션의 VPP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력발전에 특화된 보상체계, 왜 문제인가
현재 한국 전력시장은 ‘연료비 중심’의 보상체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는 석탄·가스 같은 화력발전에는 잘 맞지만, 연료비가 없거나 거의 없는 재생에너지·ESS·수요반응 자원(DR) 같은 분산형 자원에는 불리합니다.
연료비가 있어야 돈을 번다
화력발전은 가동할 때마다 연료를 태우고 그 비용이 전력시장 가격에 반영됩니다.
반면 태양광·풍력은 연료비가 없으니 같은 방식으로는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운전 특성이 전혀 다른데 동일 잣대 적용
가스발전은 필요할 때 가동·중단이 가능하지만 그 과정이 더 오래걸리는 반면, ESS는 충방전 기능을 통해 빠른 대응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시장 보상 기준은 가스발전의 ‘가동시간·연료비 구조’에 맞춰져 있어 ESS의 장점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수요 반응(DR)도 과소평가
전력 피크 시 수요를 줄여주는 DR 자원은 발전소 건설보다 훨씬 효율적이지만, 현 체계에서는 보상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현재 시장 구조는 화력발전이 중심이 되고, 분산형 자원은 주변부로 밀려나는 결과를 낳습니다.
옛날에는 편지를 보내려면 종이, 봉투, 우표 같은 ‘비용’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우표를 샀는가’가 가치의 기준이 됐죠. 하지만 이메일은 우표가 필요 없고 비용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만약 세상이 여전히 ‘우표를 몇 장 샀느냐’만으로 의사소통의 가치를 평가한다면 이메일은 “가치 없는 것”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지금 시장이 재생에너지와 ESS를 그렇게 취급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대로라면 VPP(가상발전소)가 활성화될 수 없고, 재생에너지 확대도 가속도가 붙기 어렵습니다.
에너지 전환과 안보까지 걸린 문제
분산형 전력 시스템 전환은 단지 탄소중립의 문제가 아닙니다. 에너지 안보와 직결됩니다.
2023년 한국은 LNG 4412만 톤을 수입하며 약 43조 원을 지출했습니다.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시스템을 구축하면 이런 막대한 외화 유출을 줄이고, 동시에 국내 재생에너지 산업을 키워 산업 경쟁력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전력 시장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가상발전소(VPP)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분산형 전력 시스템의 핵심 열쇠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화력발전 중심 보상체계에서는 결코 활성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는 전기요금이 다시 화석연료로 흘러가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탄소중립은 멀어질 뿐입니다. 이제 전력 시장은 연료비 지출이 아닌 에너지 전환과 분산형 자원 활성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국이 탄소중립 목표를 지키고,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까지 동시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