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석탄발전소, 2011년 건설 초기부터 ‘이주 권고’...피해 가능성 인지
지역사회는 “우리는 오로지 피해만...보상도, 혜택도 없다”
필리핀 현지 단체 “어떤 신규 자금도 이 파괴적인 사업에 흘러들어가선 안 돼
필리핀 세부주 나가시티에서 한국전력공사(한전)가 운영하는 석탄화력발전소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10년 넘게 건강 악화와 생계 위협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화력발전소는 자금 조달에도 빨간 불이 켜져 좌초자산화에 직면한 상태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무분별한 석탄발전소 운영을 유지해 온 한전 과오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15일 기후솔루션이 입수한 필리핀 시민사회단체 연합 ‘필리핀기후정의운동’(PMCJ, Philippine Movement for Climate Justice)의 5월 피해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가동하기 시작한 한전의 세부 석탄화력발전소로 인해 발전소 인근 지역에서는 호흡기 질환과 심혈관 질환이 반복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한전은 2005년 필리핀 현지 전력회사인 SPC파워코퍼레이션(SPC Power Corporation)과 공동으로 KSPC를 설립했다. 2011년 200MW(메가와트)급의 세부 석탄화력발전소가 준공돼 상업 운전이 개시됐고, 이는 필리핀 비사야스 지역의 네그로섬과 세부섬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세부 석탄화력발전소는 한전의 해외발전사업 프로젝트 중 최초의 상업발전소로, 한전이 석탄 조달부터 생산, 판매 등 전 과정을 책임지고 있다.
보고서에는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석탄재와 오염물질이 인근 수자원과 대기질에 영향을 미치면서 어린이와 성인 모두 천식, 폐렴, 피부질환 등을 호소하고 있으며, 마을 보건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증언도 담겼다.
어획량 감소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발전소 인근 해역에서 활동하던 어민들은 과거 얕은 바다에서도 15킬로그램이 넘는 어획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거의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이 같은 어족자원 감소가 석탄재와 오염물질의 해양 투기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관련돼 있다고 보고 있다.
식수 문제도 거론된다.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던 샘물은 발전소 인근 석탄재 투기 이후 변색되고 악취가 발생했으며, 일부는 피부 자극 증상까지 유발하고 있다. 특히 보고서는 발전소 건설 초기부터 일부 가구에 이주 권고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사업자 측이 사전에 피해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증거라고 꼬집었다. 또 당시 공청회와 정보공개 과정에서 주민 참여는 제한적이었으며, 실제 보상이나 모니터링 결과는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라퀴엘 에시리투(Raquel Esiritu) PMCJ 사진 출처: PMCJ
현지 단체 ‘체인지 나가’(CHANGE Naga)의 대표 라퀴엘 에시리투(Raquel Esiritu)는 PMCJ 보고서에서 “수질이 변하고, 피부병이 발생하고 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도미나도르 바사야 주니어(Dominador Basaya Jr.)는 “우물물이 석탄재 탓에 검게 변했지만, 주민 의견을 제대로 듣는 주체가 없다“고 토로했다. 익명을 요청한 주민은 “이 모든 피해에도 불구하고 나가 지역의 전기요금은 여전히 높으며, 석탄발전소는 주민들에게 어떤 보상도, 혜택도 주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도미나도르 바사야 주니어(Dominador Basaya Jr.)
이처럼 장기간 누적된 피해에도 불구하고, 한전의 발전소 건설을 지원한 아시아개발은행(ADB)도 실질적인 구제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12년 ADB 내부 컴플라이언스 리뷰는 해당 사업이 환경, 정보공개, 주민 의견수렴 등 내부 정책을 위반했음을 인정하고 시정 권고를 제시했다. 그러나 5년간의 공식 모니터링 이후에도 그 절반은 이행되지 않은 채 종료됐다. 피해 주민에 대한 명확한 보상 조치도 없는 상황이다.
PMCJ의 정책·캠페인·커뮤니케이션 총괄 엘레노어 바르톨로메는 “한전은 수십 년간 한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등 해외 곳곳에서 해로운 투자로 막대한 이익을 챙겨왔다”며 “그 결과 우리 지역사회는 터전에서 쫓겨나고, 생계수단을 뺏기고, 바다와 공기는 오염되고, 환경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병들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전 채권 발행을 지원한 금융기관들에 대한 글로벌 시민사회의 비판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3월 20여 개의 국제 단체들이 공동서한을 통해 JP모건, 씨티, HSBC 등 채권 발행기관에 한전의 화석연료 프로젝트에 대한 금융 중단을 요청했고, 최근에는 글로벌 플랫폼 에코(Eko)를 통해 4만여 명의 시민들이 이에 동참했다.
실제로 한전은 2022년부터 세부 석탄발전소에 대한 지분 매각을 추진해왔으나, 전 세계적인 탈석탄 금융 흐름 속에서 석탄발전소에 대한 투자 매력이 크게 떨어진 가운데 앞서 1~3차 입찰은 모두 실패했다.
또 지난 5월 싱가포르 증권거래소를 통해 글로벌 채권에 기후리스크가 누락되었다는 공익 신고까지 접수되면서 한국전력의 글로벌 자금 조달에 부담이 커진 상황이다. 한국전력은 지난 1월 4억 달러 규모의 달러채 발행 이후, 6월에 10억 달러 채권의 만기가 도래했음에도 해외 채권 발행에 나서지 않고 있다.
한전은 필리핀 외에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석탄화력발전소를 운영 중이다. 한국전력과 금융기관들이 이에 대한 책임 있는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한전의 석탄발전소가 위치한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도 피해는 확대될 전망이다.
바르톨로메 총괄은 “한전은 이미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으면서도 자사의 더럽고 파괴적인 사업에 눈 감고, 귀 닫고 있다. 이는 석탄 중심의 투자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녹색’으로 포장하는 그린워싱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어떤 신규 자금도 이 파괴적인 사업에 흘러들어가서는 안 된다”며 “한전은 지금이라도 피해 지역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을 제공해야 하며 완전한 탈석탄을 선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솔루션 기후금융팀의 아일린 리퍼트 연구원은 “글로벌 자본은 석탄에서 빠르게 이탈하고 있고, 한전의 미래 자금 조달 가능성도 이러한 변화에 발을 맞추느냐에 달려 있다”며 “한전이 글로벌 자본 시장에 접근하려면 석탄에서 즉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석탄에 대한 투자를 지속할 시, 투자자와 규제기관의 한전에 대한 신뢰가 저하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생태계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도 계속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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