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플라스틱에 관한 협약이 아닙니다. (This is not a plastic treaty.)”
협상 초기, 일부 정부 대표단이 이런 발언을 내놓았습니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오염을 끝내기 위한 자리에서, “플라스틱 협약이 아니다”라니요.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체 무엇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요?
INC-5.2란 무엇인가?
우리가 매일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은 이제 바다와 공기, 심지어 수많은 생명의 몸속까지 파고들며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가 모인 자리가 바로 ‘국제 플라스틱 협약 제5차 정부간협상 속개회의’(INC-5.2). 지난 8월, 회의가 열린 제네바 현장에 직접 다녀왔습니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에 관한 정부간협상위원회(아래에서는 ‘INC’)는 유엔환경총회(UNEA)가 2022년 3월 2일 채택한 결의 「End plastic pollution: towards an international legally binding instrument」(UNEP/EA.5/Res.14)를 근거로 합니다. 당사국들은 이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해 플라스틱 생애 전 주기(full lifecycle)에 걸친 조치를 포함하는 국제협약을 만들기로 합의했고, 그 업무를 유엔환경계획(UNEP)에 위임했습니다. 이후 UNEP이 INC를 구성해 2022년 하반기부터 2024년까지 5회에 걸쳐 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제5차 회의(INC-5)가 지난해 부산에서 열렸지만 최종 문안에 대한 협상 타결에 이르지 못해, 속개회의(중지된 회의를 다시 시작하는 회의)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제5차 회의의 속개회의인 INC-5.2가 2025년 8월 5일부터 14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던 것입니다.
전 세계 NGO들의 하나된 목소리: 플라스틱의 과도한 생산을 줄이자
협상장에는 전세계 시민사회단체들이 옵서버(observer)로 참가했습니다. 옵서버란, 결정권은 없지만 협상 과정을 감시하고, 정부 대표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하는 구성원을 말합니다. 옵서버로 회의에 참여한 시민사회단체들은 효과적이고 강력한 협약을 염원하는 하나된 마음으로, 협상장 안팎에서 지역을 초월한 연대를 형성했습니다.
협상장 안에서는 나란히 앉아 정부대표들의 발언을 긴밀히 모니터링하며 어떤 국가들이 협상을 주도하고, 어떤 국가들이 협상을 방해하는지, 어떤 국가들이 중간 지대에 서 있는지 확인하고 전략적 행동을 고민했습니다. 협상을 가로막는 국가들의 주장을 어떻게 논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집단지성을 모으기도 했고요.
협상장 밖에서는 공동 행동을 통해서 정부 대표들에게 현재 세계가 협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알렸습니다. 플라스틱 오염을 종식하는 협약을 만들기로 한 UNEA 결의의 약속을 환기시키며, 국가들의 책임을 촉구했던 것입니다.
협상 시작 전날 열렸던 집회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시민사회단체들이 “플라스틱 생산을 줄여라” 등의 메시지를 담은 거대한 피켓과 함께 붉은 옷을 맞춰 입고 모여 불꽃을 형상화한 집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날 유럽에는 이상기후로 인한 폭염이 찾아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비 오듯 흐르는 땀도 전세계에서 모인 활동가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기후솔루션 역시 옵서버 자격으로 협상을 참관하며, 주로 한국 정부 대표단을 대상으로 플라스틱의 과도한 생산과 소비를 줄여 오염과 기후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효과적 협약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습니다.
왜 생산 감축인가?
이번 협상의 근거가 된 UNEA 2022년 결의는 플라스틱의 ‘전 생애 주기(full lifecycle)’에 걸친 조치를 포함한 협약을 만들기로 하는 명확한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플라스틱 오염과 기후영향이 단순히 소비 이후의 다운스트림(downstream) 단계, 즉 폐기물 관리와 재활용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므로, 플라스틱의 생산까지 포괄하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는 국제사회 공동의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플라스틱의 생산은 2000년부터 2019년 사이에 약 2배 가까이 급증했고 (239Mt→460Mt) 2040년에는 2000년 수준의 3배에 가까운 수준인 736Mt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OECD, 2024). 플라스틱을 과도하게 생산하여 짧게 쓰고 버리고, 또다시 화석연료를 사용해 새로이 생산하는 악순환을 구조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바다 오염의 해결도, 화석연료의 과도한 소비로 인한 기후영향의 해결도 요원하기만 합니다. 업스트림(upstream), 즉 플라스틱의 생산 단계부터 국제적인 공동행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협상의 난관: 다수의 의지를 가로막는 소수의 강력한 거부
그러나 일부 산유국과 강대국들은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첫날부터 생산(production)에 관한 핵심 의무들을 협약에 담기를 거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심지어 생애 전 주기(full lifecycle)라는 단어조차 협약에서 빼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플라스틱에 관한 협약이 아니다”라는 명언(?)이 등장했던 것도 이 시점이었습니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이 플라스틱에 관한 협약이 아니면 대관절 무엇일까요? 이 협약은 플라스틱 ‘폐기물’에 관한 협약이 되어야 한다, 즉 생산 단계 조치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국가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일부 국가들은 유명 영화 제목까지 꺼내 들었습니다. 생산 단계 조항까지 포함하는 협약 문안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모든 것들을,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즉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하기 위해 비유까지 꺼내 들었던 것입니다.
소수가 사실상 거부권(veto)을 휘두르며 협상을 지배할 때
협상에 참여한 국가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이와 같이 협상을 가로막는 국가의 수는 소수에 속했습니다. 플라스틱 오염 피해의 최전선에 있는 여러 국가들이 이런 국가들의 방해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소수 국가의 방해는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협상 기간 절반이 지나가기까지 ‘생산 감축’에 관한 조항인 제6조는 구체적 문구 협상을 위한 테이블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 조항이 옵서버들이 참관할 수 없는 비공개 협의 자리에서 논의되었다는 소식은 전해졌지만, 제6조를 논의하는 소그룹(Contact Group)에서 더 이상의 실질적 협상은 목격할 수 없었습니다. 상황을 좀 더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학교에서 휴대폰 사용을 줄이기 위한 규칙을 학생들이 협의해서 정하기로 했는데, 교실이 아닌 복도나 옥상에서 비밀리에 삼삼오오 대화만 오갈 뿐, 정작 교실에서 휴대폰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도록 할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가 계속된 것입니다.
한편 협상이 진행될수록 시민사회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옵서버들에게 공개된 협상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비공개 회의(informals)가 그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협상이 열린다고 해서 부랴부랴 회의장까지 갔더니 불과 시작 시간 10여분 전에 회의가 비공개로 전환되기도 하고, 협상이 열리기는 했으나 1시간 정도 진행된 뒤 비공개 회의로 전환되는 등,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의장은 이번 협상 시작 전 옵서버들을 초대해 별도의 세션을 열고 협상의 투명성을 약속했었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틈새를 찾아내는 연대의 의지
그러나 시민사회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 나갔습니다. 협상 중간 지점, 총회(plenary)가 열리던 날 전세계 시민단체들은 정부 대표단들이 드나드는 통로에 “플라스틱 오염을 종식하라” “약속을 지켜라” 등의 피켓을 들고 모여 우리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각국 시민단체들은 각자의 정부대표단과도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기후솔루션 역시 협상 중간 틈새 시간을 활용하여 한국 정부대표단과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한국의 다른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정부대표단과 시민사회단체의 면담 자리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협상장을 방문한 한국 국회의원과도 만나 플라스틱 생산 감축의 필요성을 설명했습니다.
우연한 행운도 있었는데, 제네바로 가는 비행기에서 기후솔루션 팀원의 옆자리에 정부대표단 구성원이 탑승했던 것입니다. 이에 협상 중간에 해당 구성원과 만나 대화를 이어 간 일도 있었습니다.
의장의 반전(?) 그리고 밤샘 회의 끝에 남은 빈손
협상 종료까지 단 하루를 남겨둔 13일 오후, 의장이 협상 경과를 종합하여 반영하였다는 의장 안(Chair’s text)을 발표했습니다. 이 안을 받아보고 많은 사람이 크게 놀랐는데,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관한 제6조가 아예 통째로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유해한 플라스틱 내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 등 여러 중요 조항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장이 어떻게든 협의의 진전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인식 아래, 강력하게 생산 규제를 거부하는 소수 국가들의 압력에 자리를 내어 준 것으로 평가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원래는 14일 오후 3시, 총회(plenary)를 마지막으로 협상이 종료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장 안이 공개된 후 치열한 비공개 협상이 계속되면서, 총회 일정은 무한정 연기되었습니다. 저녁이 되어도 총회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옵저버 단체들은 아예 회의장 앞 잔디밭에 진을 치고 총회 개회를 기다리기 시작해, 마치 대규모 야간 캠프를 보는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14일 자정을 넘긴 15시 0시 48분, 의장이 보완된 ‘의장 안’을 내놓았습니다. 이 안은 13일 안보다 상당히 보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관한 제6조는 빠진 상태였습니다. 이후 15일 새벽부터 오전까지 총회가 진행되었지만, 결국 INC-5.2도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정부대표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열흘 동안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번에도 협약 성안에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계속된다
잠깐 협상 기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협상 기간 중, 각국에서 모인 NGO들이 아침 일찍 모여 지난 회의에 대한 소회를 공유하는 회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회의 장소에는 햇빛이 잘 들었고, 아침 햇빛 아래 각국의 다양한 음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지지부진한 협상에 지친 마음을 격려하며, 동료들은 빛을 간직한 눈동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 아침의 대화들은 마음 속에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 대한 전세계적 약속을 만들기 위한 협상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번 협상은 실망을 남겼지만, 다음 협상에서도 플라스틱의 과도한 생산으로 인한 오염과 기후변화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을 가진 많은 국가들이 협상장에서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수많은 시민단체, 전문가, 과학자, 언론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의지와 지지를 어떻게 협상장에서 생산 감축을 약속하자는 강력한 목소리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인지가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될 것입니다.

총회(plenary) 장소에 선 기후솔루션의 팀원들